고구려-수이 전쟁(고수 전쟁) 3


박각순 – 살수전투

살수전투에서 30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은 참패에 분노한 양황제는 장수들을 해임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고구려에 대한 원망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많은 국내 문제를 제쳐두고 양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주장했지만, 결국 나라를 황폐화시켰다.

1. 3차 대전

1.1 요동성 전투

613년 3월 수 양제는 다시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살수전투 때보다 병력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은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다. 왕인공의 선봉이 신성을 공격하고 성에서 나온 고구려군을 격파한다. 그리고 다른 성을 지원하는 길을 막는 신을 막아라. 주력군은 요하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격했다. 당과 고구려 모두 약 20일 동안의 강력한 공격에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이어 요동성과 함께 위에서 아래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 10만 개 이상의 포대를 구축해 공격한다. 바퀴 여덟 개의 망루를 세워 성보다 높게 세우고 성을 내려다보며 총을 쏘았다. 또한 압록강변에 별동부대가 형성되어 보관되었다.

1.2 양현감의 난

당시 Yang Xiangam과 Li Mi는 Sui Dynasty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Yang 황제는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양현암의 친구였던 병부시와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이러한 내막이 알려졌다. 양황제는 장군들을 불러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고구려의 눈에 띄지 않게 후퇴하기 위해 무기와 탄약을 진영에 놔두고 재빨리 도망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고구려는 수나라 진영이 온전한 것을 보고 감히 나가지 못하고 뒤늦게 후퇴하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수만 명의 적군을 무찔렀다. 이번에는 요동성이 끝까지 내밀어 철의 요새임을 증명했다.

2. 4차 대전

양황제가 귀국한 후 양현감의 난을 진압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수나라 내에서 장기전, 재정부담, 징병 등의 불만이 폭발하여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양황제는 국내의 혼란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구려 정벌의 위업을 달성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614년 다시 원정을 떠났다. 내화아가 고구려의 비사성을 공격하게 하여 내화아가 점령하였다. 그러나 수나라의 반란으로 군대가 움직이지 못하고 내화의 수군은 공격을 계속할 수 없었다. 고구려도 기나긴 전쟁에 지쳤기 때문에 영양왕은 망명한 곡사정을 수나라로 돌려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양 황제는 체면을 구하고 내화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이것으로 두 나라 간의 긴 전쟁이 끝납니다.

3. 고구려-수 전쟁의 결과

고구려-수 전쟁은 학자들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전쟁으로 간주된다. 한국사에서는 강감찬의 귀주해전, 이순신의 한산도해전과 함께 3대 해전으로 불린다. 수나라는 막강한 국력을 소진했고, 지방 각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반란을 일으켜 멸망했습니다. 고구려 원정 때 동원된 병력 징집으로 한낮에 노동을 해야 하는 청년 인구가 부족했고, 군미도 강제 징수되면서 민생은 피폐해졌다. 2차대전에만 113만명의 군인이 동원됐고 군식을 비롯한 인적·물적 자원이 모두 녹아내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과 행정력의 파탄, 각지의 난, 백성들의 징집 거부로 실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우문살의 아들 우문화와 함께. 618년 수나라는 당나라에 멸망당한다. 고구려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수나라를 상대로 살수대첩과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중국 통일왕조와의 체급 차이로 국력이 소진되었다. 특히 훗날 고려에서 채용된 들전술로 인해 요동벌에서 평양까지의 논이 불태워져 농업 생산성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와 백제가 동요되지 않도록 국력을 재편해야 했다. 이 틈을 메우기 위해 국경의 일부를 신라로부터 빼앗아 신라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은 수나라가 멸망한 후 부흥의 시간을 벌기 위해 당나라에 우호적인 정책을 세웠다. 초기 당나라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으로 황폐해진 한국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를 유지했다.